
0. 들어가며
“팝 산업을 거부해 비로소 팝스타가 되었다.”
참으로 모순적인 말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 한 아티스트는 실제로 팝 산업과의 결별을 선언한 뒤에야 비로소 ‘팝스타’가 되는 길 위에 설 수 있었다.
화려하게 묘사되는 팝 산업의 이면에는 언제나 히트곡을 만들어 내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이름’들이 존재한다.

©KAPFHAMMER
그리고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레이(RAYE) 역시 오랫동안 그 이름들 가운데 하나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는 그 자리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강제로 남겨져야 했다는 것.
클럽에서 울려 퍼지던 훅, 라디오에서 반복되던 후렴.
많은 사람들이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이 글은 한 아티스트가 음악 산업의 구조와 정면으로 맞서며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 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1. 내 이름은?

©RAYE
런던에서 태어난 레이는 어머니가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아버지가 음악 감독을 맡고 있던 교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자연스럽게 음악은 그녀의 일상 속에 있었고, 그 안에서 뮤지션의 꿈도 함께 자라났죠.
불과 6학년이 되던 해, 레이는 콘서트를 위해 첫 곡을 작곡하고, 아버지에게 배운 피아노로 사우스워크 대성당에서 공연을 하며 어린 나이에 무대 경험을 쌓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음악과 함께 자란 레이는 아델(Adele), 에이미 와인하우스(Amy Winehouse), FKA 트위그스(FKA Twigs)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배출한 영국의 대표적인 예술 학교, 브릿 스쿨(BRIT School)에 입학을 하는데요.

©GRM Daily
하지만 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학생들 사이에 만연한 경쟁과 서로에 대한 질투 속에서 레이는 점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결국 16세의 나이에 학교를 자퇴하게 되죠.
이후 레이는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에 직접 음악을 업로드하며 독립적으로 창작 활동을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사운드 클라우드에 업로드한 그의 첫 데뷔 EP [Welcome to the Winter]의
수록곡 ‘Hotbox’. 작곡, 녹음, 프로듀싱까지 대부분의 작업을 스스로 도맡았다.
그리고 레이는 곧 업계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요.

©Years & Years
특히 밴드 이어스 앤 이어스(Years & Years)의 리드 보컬 올리 알렉산더(Olly Alexander)의 눈에 띄면서 상황은 빠르게 전개됩니다.

자퇴 단 1년 만인 17세, 레이는 단숨에 *폴리도르 레코드(Polydor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하며 순조롭게 팝 시장에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준비를 모두 갖추었죠.
*폴리도르 레코드: 유니버설 뮤직 그룹 산하 레이블. 현재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 레이디 가가(Lady Gaga) 등이 소속되어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은 긴 싸움의 시작이었습니다.
2. 시작된 악연
레이는 조나스 블루(Jonas Blue)의 싱글 ‘By Your Side’에 피처링으로 참여하며, 계약 2년 만에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Official Single Chart)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시작으로 레이는 대규모 레이블 아래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이어갔는데요.

©RAYE / Charli xcx
- 찰리 xcx(Charli xcx), 리틀 믹스(Little Mix), 존 레전드(John Legend), 비욘세(Beyoncé) 등의 곡 공동 작곡
- 제스 글린(Jess Glynne), 할시(Halsey), 칼리드(Khalid) 등 투어 오프닝 게스트 참여
- 데이비드 게타(David Guetta)와 함께한 ‘Stay (Don’t Go Away)’로 빌보드 댄스/믹스 쇼 에어플레이 차트(Billboard Hot 100Dance/Mix Show Airplay) 차트 1위 기록
등 상업적인 성과를 거두었죠.
하지만, 겉으로 보면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여도 문제는 분명했습니다.

‘레이만의 온전한 작품이 없었다’는 것.
싱글과 EP는 있었지만, 2014년 계약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정규 앨범은 단 한 장도 없었습니다.
물론 재능이 뛰어난 아티스트이기에 하나의 앨범에 오랜 기간 공을 들이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지속적으로 싱글과 EP를 발표해 왔고, 충분히 정규 앨범으로 확장될 수 있는 창작물을 쌓아왔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에는 한계가 있었는데요.
더군다나 타 아티스트의 곡 작업 참여는 물론, 약 30회에 달하는 뮤직비디오 출연 등 다방면에서 드러난 그의 넘치는 활동량과 열정 역시 ‘준비 중인 아티스트’라는 설명만으로는 쉽게 납득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레이는 이처럼 화려한 이력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은 대중적 인지도를 얻지 못한 채 흘러가듯 소비되던 아티스트에 가까웠는데요.

그리고 2021년, 침묵을 깬 레이의 SNS 속에는 그간 레이의 앨범 발매를 거부해온 레이블의 압박이 드러났습니다.
“I’m done being a polite pop star.”
“더 이상 예의 바른 팝스타 노릇은 그만하겠다.”

레이가 SNS를 통해 밝힌 내용으로는 당시 그가 계약을 통해 4장의 정규 앨범 발매를 약속받았지만, 레이블의 요구에 따라 주 7일씩 근무하며 장르를 바꾸며 수십 곡의 음악을 제작했음에도 단 한 장의 앨범 발매도 승인받지 못했음을 밝혔죠.
그렇게 7년간 이어진 보이지 않는 싸움 끝에, 레이는 공개적인 비판과 함께 레이블을 떠나게 됩니다.
3. 산업을 거부한 팝스타

©RAYE
2023년, 마침내 발매되는 레이의 정규 데뷔 앨범이자 활동 9년 만의 첫 정규 앨범인 [My 21st Century Blues]에는 세간의 관심이 끌렸습니다.
이 앨범에는 산업 내 압박과 정신 건강 문제, 섭식 장애와 약물 중독, 그리고 개인적으로 겪었던 성폭행 경험까지 그동안 숨겨져 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는데요.
그간 차트를 겨냥한 신나는 댄스 팝 음악 제작자로만 보였던 레이의 어두운 내면과 솔직한 고백이 담긴 작품이었죠.
그렇게 레이가 처음으로 차트를 노리지 않고 제작했다고 밝힌 앨범은 아이러니하게도 차트를 점령하게 됩니다.
영국 오피셜 앨범 차트(Official Album Chart) 2위 데뷔, 수록곡 ‘Escapism’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1위 달성, 미국 빌보드 앨범 차트 200(Billboard 200)과 빌보드 핫 100(Billboard Hot 100)에까지 오르며 레이는 단숨에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는데요.
그리고 결국..

©JMEnternational
2024년 브릿 어워드(Brit Awards) 최우수 신인 아티스트와 올해의 아티스트를 동시에 석권하는 쾌거를 이뤄낸 레이는 올해의 작곡가 부문 최초의 여성 수상자를 포함해 6개 부문 수상으로 단일 시상식에서 최다 수상 기록까지 경신하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게 됩니다.
4. 이 음악에는 희망이 담겨있을지도 모릅니다.
https://www.instagram.com/p/DPA68KVEfMR/
아마도 최근 아티스트에게 두 번째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1위를 안겨준 리드 싱글 ‘Where Is My Husband!’를 통해 레이를 새로 알게 된 분들도 많으실 텐데요.
갑자기 등장한 ‘괴물 신인’처럼 보였던 그 순간 뒤에는, 사실 이처럼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침묵과 그 안에 쌓여 있던 고통의 서사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RAYE
그렇기에 현지 시각 3월 27일 발매를 앞두고 있는 레이의 정규 2집 [THIS MUSIC MAY CONTAIN HOPE.]는 단순한 다음 작품이 아니라, 한 아티스트가 지나온 시간을 통과하며 도달한 또 하나의 기록에 가까운데요.
레이는 이번 앨범에 대해, 어려운 시기를 지나온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희망에 대한 믿음’을 담고자 했다고 밝혔습니다.
이전 앨범에서 ‘음악’을 ‘약’에 비유했던 그는 이번에도 여전히 음악을 하나의 치유 수단으로 바라보며, 이 앨범이 정서적인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포옹이 되고, 침대가 되고, 혹은 잠시 머무를 수 있는 부드러운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하기도 하였죠.
긴 시간의 침묵을 깨고 팝 산업을 거부한 끝에 비로소 자신의 이름으로 서게 된 팝스타, 레이.
이제 레이는 더 이상 누군가의 곡 속 목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증명해 내는 아티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비단 레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지금 어떤 페이지를 지나고 계신가요?
감사합니다 :)
l Photo. Malick Bod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