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른 성공을 마주한 이들은 종종 그 끝에서 공허함을 느끼곤 합니다.

©Holly Humberstone
그리고 이는 영국 출신 싱어송라이터 홀리 험버스톤(Holly Humberstone)에게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지난 몇 년간 가장 빠르게 성장한 인디 팝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홀리 험버스톤은 정식 데뷔 이전부터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Glastonbury Festival)>의 ‘BBC Introducing’ 무대를 비롯한 여러 페스티벌과 투어를 거치며 빠르게 이름을 알렸습니다.
이후 두 장의 EP를 발표하며 꾸준히 주목받았고, 브릿 어워드 라이징 스타 부문(BRIT Awards Rising Star) 수상과 함께 올리비아 로드리고(Olivia Rodrigo), 루이스 카팔디(Lewis Capaldi) 등의 투어 참여를 통해 글로벌 팝 시장이 주목하는 아티스트로 자리 잡게 되죠.
그렇게 발표된 데뷔 앨범 [Paint My Bedroom Black]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느낀 고립감과 불안, 그리고 집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홀리 험버스톤을 지금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오히려 그 이후에 있는데요.

©Holly Humberstone
바로 두 달 전 공개된 정규 2집 [Cruel World] 때문입니다.
만약 [Paint My Bedroom Black]이 세상과 자신 사이에 놓인 거리감을 기록한 작품이었다면, [Cruel World]는 그 거리 너머에서 잃어버린 자신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에 가까운데요.
"아티스트로서의 나는 알겠는데, 인간으로서의 나는 누구인가?"
수년간 쉼 없이 이어진 투어와 활동 속에서 홀리 험버스톤은 어느 순간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가고 있다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가족이 20년 넘게 살아온 고향 집을 떠나게 되면서 그는 어린 시절의 물건들을 정리하게 되었는데요.
오래된 CD와 책, 장신구, 그리고 어릴 적 읽던 그림 형제 동화책까지.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보며 그는 잊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아티스트는 이 과정을 통해 "잊고 있었던 나 자신을 다시 발견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죠.

©Holly Humberstone
그리고 이 경험은 자연스럽게 '집(Home)'이라는 주제로 이어집니다.
오랜 시간 자신의 일부였던 공간이 사라지자 그는 집이 더 이상 특정한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는데요. 아티스트 생활 이후, 수년간 여행 가방과 호텔방을 전전하며 살아온 그는 런던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이번 앨범을 통해 소속감과 안정감, 그리고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는 사랑도 존재했는데요.
홀리 험버스톤은 이번 작품에서 처음으로 깊은 사랑과 관계를 경험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어놓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단순히 행복한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고, 동시에 그 사람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일을 얘기하죠.
그래서 [Cruel World] 속 사랑은 로맨스보다는 성장에 가깝습니다. 아티스트는 사랑이 주는 설렘과 안정감뿐 아니라 불안과 상실의 가능성까지 함께 노래하며, 타인과 연결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이해해 갑니다.

©Holly Humberstone / Silken Weinberg
이렇듯 [Cruel World]는 홀리 험버스톤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지점에서 완성되는데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다시 발견하고, 고향 집을 떠나며 집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고, 처음으로 깊은 사랑을 경험하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
홀리 험버스톤은 이번 작품을 통해 혼란스러운 20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의 솔직한 기록을 남겼고, 이는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감정들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덕분에 앨범의 제목은 [Cruel World]이지만, 곡들은 생각보다 밝고 생동감 있는 사운드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의 이전작보다 훨씬 따뜻하고 개방적이며, 익숙한 팝 프로덕션 위에서도 홀리 험버스톤 특유의 섬세한 보컬과 서정적인 작법이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더하여 이번 앨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바로 비주얼인데요.
홀리 험버스톤은 이번 작품을 자신만의 '다크 페어리테일(Dark Fairytale)' 세계라고 설명합니다. 앨리스 이야기와 그림 형제 동화, 고딕 판타지에서 영감을 받은 비주얼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현재의 자신,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세계를 상징하죠.

©Holly Humberstone
특히 앨범 비주얼 곳곳에서 아티스트가 들고 다니는 검은 공식적으로 의미가 설명된 적은 없지만, 많은 이들은 이를 잔인한 세상을 헤쳐 나가는 주인공의 여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종종 팬들 사이에서 요정으로 언급되는 홀리 험버스톤의 비주얼과 대비되는 검은 어린 시절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 사이를 오가며 성장해 온 홀리 험버스톤의 모습을 상징하는 장치처럼 여겨지죠.
결국 [Cruel World]는 여느 20대 혹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법한 "세상은 때때로 잔인하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계속 살아가고 사랑하며 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앨범이 특별한 이유는 그 성장 과정을 거창한 성공담이 아닌 자신이 과거부터 쌓아온 기억과 취향들로 포장하였기 때문이라고 느껴지는데요.
성장에는 정답이 없고,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배워갑니다. 어린 시절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감각, 어딘가에 속하고 싶다는 마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했던 기억까지. 만약 여러분이 지금 인생의 어느 과도기를 지나고 있다면, 이 앨범을 한 번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홀리 험버스톤의 음악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릅니다.
l Photo. Holly Humberst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