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여러분, namyu입니다.
가끔 음악을 듣다 보면 곡 자체보다 “이 사람은 도대체 이런 음악을 어떻게 만들었을까?”가 더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저는 지난 8월 스티브 레이시(Steve Lacy)의 공연을 다녀왔는데요. 평소 같았으면 어떻게든 스탠딩 맨 앞자리를 노렸겠지만, 이날만큼은 그의 음악을 조금 더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빠른 대기 입장이 가능했음에도 과감하게 스탠딩을 포기하고, 무대가 가장 잘 보이는 지정석 정가운데에 자리를 잡았죠.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꿈만 같았던 순간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바로바로 ‘Dark Red’의 아웃트로였는데요. 그 순간만큼은 무대 위에 기타와 한 몸이 된 남자, 그리고 그 남자와 한 몸이 되어버린 또 다른 남자(저)만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Gus Van Sant
지금은 굵직한 디스코 그래피를 통해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스티브 레이시지만, 그의 초기 작업 방식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면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수천만 원짜리 장비도, 거대한 스튜디오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었던 건 화면이 깨진 아이폰 한 대였죠.

당시 스티브 레이시가 주로 사용했던 건 화면이 깨진 아이폰과 개러지밴드(GarageBand), 그리고 기타와 베이스를 스마트폰에 연결할 수 있는 아이리그(iRig)였습니다. 개러지밴드로 드럼 패턴을 만들고 그 위에 기타와 베이스를 하나씩 쌓아 올렸으며, 보컬 역시 아이폰 내장 마이크를 이용해 직접 녹음했는데요. 물론 스마트폰으로 떠오른 멜로디나 아이디어를 간단히 기록하는 뮤지션은 많습니다. 하지만 스티브 레이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습니다. 아이폰을 단순한 메모장이 아닌, 실제로 곡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작업실처럼 활용한 것이죠.

*개러지밴드 : 아이폰이나 아이패드, 맥에서 드럼 비트를 만들고 여러 악기를 녹음해서 겹치거나, 보컬을 녹음하고 간단한 편집·믹싱이 가능한 애플에서 만든 음악 제작 프로그램
*아이리그 : 기타나 베이스 같은 악기를 아이폰에 연결해 녹음할 수 있게 해주는 작은 오디오 인터페이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방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2017년 공개된 그의 첫 솔로 프로젝트 [Steve Lacy’s Demo]입니다. 스티브 레이시는 이 프로젝트를 직접 쓰고, 프로듀싱하고, 녹음하는 전 과정을 아이폰을 이용해 진행했습니다. 기타와 베이스를 직접 연주하고, 드럼 패턴을 만들고, 보컬도 아이폰 내장 마이크로 녹음했죠. 그러니까 ‘아이폰으로 음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단순히 과장된 수식어는 아니었던 겁니다. (그냥 천재라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스티브 레이시가 처음부터 아이폰을 자신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으로 선택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맥북 프로를 갖고 싶어 했지만 쉽게 가질 수 없었고, 작은 모바일 기기에서 여러 음악 제작 앱을 사용하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방식에는 스티브 레이시에게 꽤 분명한 장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바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었죠. 집은 물론이고 수업 중에도 비트를 만들었고, 이발소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중 머릿속에 훅이 떠올라 바로 음악을 만들었다는 일화도 있는데요. 그렇게 작은 아이디어들을 휴대전화 안에서 하나씩 쌓고, 완성된 작업물을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나 텀블러(Tumblr)에 올리면서 조금씩 자신의 음악을 알려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커리어는 솔로 활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10대 시절, 스티브 레이시는 이미 밴드 디 인터넷(The Internet)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16살 때 디 인터넷의 세 번째 정규 앨범 [Ego Death]를 공동 프로듀싱했습니다. 이후 [Ego Death]는 2016년 제58회 그래미 어워드(Grammy Awards)에서 당시 ‘최우수 프로그레시브 R&B 앨범(Best Progressive R&B Album)’ 부문 후보에 올랐고, 스티브 레이시 역시 이 앨범에 참여한 멤버로 그래미 후보 이력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2017년,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솔로 프로젝트 [Steve Lacy’s Demo]를 공개하면서 그의 독특한 제작 방식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이 작품에는 ‘Looks’, ‘Ryd’, ‘Some’ 등과 함께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Dark Red’가 담겨 있는데요. 특히 재미있는 점은 아이폰이 처음에는 단순히 ‘좋은 장비가 없어서 사용하던 대체품’에 머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2017년 당시 스티브 레이시는 이미 노트북을 가지고 있었고, 전문 음악 제작 프로그램인 에이블톤(Ableton)을 사용할 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노트북으로 만든 곡들이 자신에게는 너무 깔끔하게 들린다고 이야기했는데요. 실제로 노트북으로 작업하다 아이디어가 잘 나오지 않자 다시 아이폰을 꺼냈고, 그러자 다시 음악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기 시작했다고 회상하기도 했죠.
처음에는 그저 손에 있는 장비였기 때문에 사용했을지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이폰으로 음악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스티브 레이시에게 꽤 익숙한 창작 방식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아이폰은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를 넘어, 더 큰 작품의 출발점에도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의 2017년 앨범 [DAMN.]에 수록된 ‘PRIDE.’입니다.
‘PRIDE.’의 시작에는 스티브 레이시와 안나 와이즈(Anna Wise)가 함께한 초기 세션이 있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은 어쿠스틱 기타와 간단한 드럼 루프를 바탕으로 보컬 아이디어를 녹음했고, 이 과정에서 아이폰과 개러지밴드가 활용됐는데요. 처음에는 ‘Wasn’t There’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졌던 이 곡을 스티브 레이시가 켄드릭 라마에게 들려줬고, 이후 추가 작업을 거쳐 우리가 알고 있는 ‘PRIDE.’로 발전하게 됩니다. 실제로 스티브 레이시는 이 곡의 프로듀서이자 작곡가로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정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PRIDE.’ 전체가 아이폰 하나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정확히는 곡의 출발점이 된 초기 세션과 보컬 작업 과정에 아이폰이 사용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흥미로운 이유는 분명합니다. 자신의 첫 솔로 프로젝트를 만들 때 사용했던 작은 아이폰이, 이번에는 켄드릭 라마의 대표적인 앨범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초기 작업 과정에도 등장했기 때문이죠.

©Spotify
결국 스티브 레이시에게 중요한 건 어떤 장비를 가지고 있느냐보다, 떠오른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제 음악으로 만들어내느냐에 더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2019년 첫 정규 앨범 [Apollo XXI]를 발표한 그는 이 작품으로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프로그레시브 R&B 앨범 부문 후보에 올랐고, 2022년 [Gemini Rights]로는 결국 같은 부문 트로피까지 거머쥡니다.
여기에 ‘Bad Habit’까지 올해의 레코드(Record of the Year)와 올해의 노래(Song of the Year) 등 주요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스티브 레이시는 자신만의 작업 방식을 가진 젊은 뮤지션을 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아티스트로 자리 잡게 되죠.
지금의 스티브 레이시를 보고 있으면 세련된 기타 사운드와 독특한 프로덕션이 먼저 떠오르지만, 그의 초기 이야기를 조금 더 알아보면 그 중심에는 상당히 작은 작업 환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화면에 금이 간 아이폰을 꺼내 개러지밴드를 켜고, 기타를 연결하고, 아이폰 내장 마이크에 보컬을 녹음했던 한 명의 10대 뮤지션. 그렇게 만든 음악은 [Steve Lacy’s Demo]가 됐고, 또 다른 아이폰 세션에서 시작된 음악은 켄드릭 라마의 ‘PRIDE.’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스티브 레이시의 이야기가 단순히 ‘아이폰으로 음악을 만든 신기한 뮤지션’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흥미로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작은 기기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방식 자체를 자신만의 작업법으로 만들어갔다는 점이 더 인상적인데요.

©Steve Lacy IG
좋은 장비를 갖춘 뒤에도 자신에게 맞는 방식이라면 다시 아이폰을 꺼내 들었던 스티브 레이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건 어떤 장비를 가지고 시작했느냐보다, 그 장비로 무엇을 만들어냈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점인지도 모르겠습니다.(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