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 글을 시작하며..
1997년 발표된 푸 파이터스(Foo Fighters)의 ‘Everlong’은 지금까지도 밴드를 대표하는 곡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노래가 처음부터 이렇게 거대한 곡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는데요. 오히려 ‘Everlong’은 아주 사적인 순간에서 시작됐습니다. 결혼 생활의 끝을 지나고 있던 밴드의 프론트맨 데이브 그롤(Dave Grohl, 이하 데이브)이 새로운 사랑에 빠지면서 만들어진 지극히 개인적인 노래였죠.
그런데 곡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이 남습니다. 대체 이 노래는 누구의 사랑 노래일까요?

누군가에게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 노래이고,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이며, 또 누군가에게는 청춘의 한 장면을 통째로 불러오는 노래이기도 합니다. 분명 처음에는 데이브 그롤 자신의 사랑에서 시작된 노래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Everlong’은 점점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각자의 기억을 담아내는 노래가 되어갔죠.
그렇다면 데이브 그롤은 어떤 순간에 이 노래를 만들었고, 한 사람을 향했던 그의 사랑은 어떻게 수많은 사람들의 노래가 되었을까요? 그 시작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Everlong’은 어떤 곡인가?
때는 1996년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푸 파이터스는 두 번째 정규 앨범 [The Colour and the Shape]를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당시 데이브는 ‘Monkey Wrench’를 작업하던 중 잠시 기타를 만지다가 새로운 리프 하나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리프를 처음 들은 데이브는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소닉 유스(Sonic Youth)의 곡을 베낀 것 같았던 것이죠. 훗날 그는 이 리프를 직접 ‘Sonic Youth rip-off’라고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실제로 데이브는 이 리프를 데모로 만들어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Thurston Moore)에게 들려줬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서스턴 무어는 이 곡을 단순한 데모로 넘기기보다 앨범에 넣어야 할 곡으로 받아들였다고 하죠.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Everlong’은 완성된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Jesse Grant/Getty Images
잠시 녹음을 멈추고 크리스마스를 맞아 버지니아로 돌아간 데이브는 친구의 집에서 지내게 되는데요. 당시 그는 첫 번째 아내 제니퍼 영블러드(Jennifer Youngblood)와의 결혼 생활이 끝나는 과정에 있었고, 친구 집 바닥에 침낭을 깔고 지낼 정도로 삶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앞서 만들어둔 기타 리프가 하나의 완전한 노래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놀랍게도 45분 남짓이었죠.
[2] ‘Everlong’은 대체 누구의 사랑 노래일까?

©Louise Post
‘Everlong’의 제작 배경에는 당시 데이브가 사랑에 빠졌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베루카 솔트(Veruca Salt)의 루이스 포스트(Louise Post, 이하 루이스)인데요. 데이브는 첫 번째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끝나가는 시기에 루이스와 가까워졌고, 두 사람의 관계는 ‘Everlong’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었습니다. 데이브는 훗날 이 곡을 “사랑에 빠진 한 여자에 관한 노래”라고 설명하면서, 단순한 육체적 혹은 정신적인 사랑을 넘어 서로 노래를 부를 때 완벽하게 화음이 맞는 것처럼 연결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습니다.
1997년 인터뷰에서는 조금 더 솔직하게 이 곡을 “make out song”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당시 그는 새 앨범이 여름 직전에 발매될 예정이라며, 사람들이 해변의 담요 위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키스하는 모습을 상상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Everlong’은 처음부터 거대한 록 앤섬을 목표로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깊이 빠져 있던 한 사람이, 자신이 느끼고 있던 연결을 기타와 목소리로 붙잡아 놓은 노래에 가까웠던 것이죠.
그런데 이 사랑의 이야기는 여기서 한 번 더 특별해집니다. 최종 녹음 과정에 그 사랑의 당사자인 루이스 역시 직접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루이스는 시카고에 있었고, 데이브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보컬을 녹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2시, 데이브는 루이스에게 전화를 걸어 잠에서 깨운 뒤 백킹 보컬을 부탁했습니다. 루이스는 이후 당시 상황을 직접 회상하면서 기타 리프 사이에 들어가는 ‘doo-doo’ 부분을 불렀고, 후렴구의 화음도 직접 만들어 녹음했다고 밝혔습니다. 이 부분은 베루카 솔트의 ‘Shimmer Like a Girl’에서 비롯된 아이디어이기도 했죠.
그런데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바로 곡 후반부에 들리는 작은 속삭임입니다. 루이스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그녀는 데이브의 전화를 받기 직전 자신과 데이브에 관한 꿈을 꾸고 있었고, 그 꿈의 내용이 노래 속 속삭임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후 최종 버전에서는 데이브의 속삭임으로 교체됐지만, 루이스는 그 가운데 하나를 자신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처럼 표현하기도 했죠. 결국 ‘Everlong’은 한 사람의 사랑을 노래한 곡이면서, 실제로 그 사랑의 상대방이 목소리를 남긴 노래이기도 했습니다.
[3] 그런데 ‘Everlong’은 왜..?

©VISITSEATTLE.tv
하지만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이렇게 사적인 사랑 노래를 왜 거대한 록 사운드를 가진 곡으로 만들었을까요?
앞서 이야기했듯 ‘Everlong’은 상당히 즉흥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데이브 역시 처음에는 이 곡을 정식 앨범에 수록할 곡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만든 것을 일종의 데모 정도로 여겼던 것이죠. 하지만 서스턴 무어에 이어 프로듀서 길 노턴(Gil Norton) 역시 이 곡을 마음에 들어 했고, 결국 밴드는 이를 정식으로 다시 녹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Everlong’은 데이브 혼자만의 사적인 기록에서 푸 파이터스의 노래로 확장하게 된 것이죠.

©Foo Fighters
그리고 당시 [The Colour and the Shape] 자체가 데이브의 이혼과 관계의 변화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는데요. 데이브는 훗날 이 시기의 작곡을 일종의 치료 과정으로 설명하면서, 자신이 직접 가사를 부르는 것이 단순히 글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치료적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무너지는 관계를 지나 새로운 사랑을 마주했던 시기. 그 복잡한 감정들이 결국 기타와 드럼, 그리고 목소리를 통해 하나의 노래로 정리된 것이죠.
그리고 ‘Everlong’을 특별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가사인데요.
If everything could ever be this real forever
이 모든 순간이 영원히 이렇게 진짜일 수 있다면
‘Everlong’은 분명 사랑 노래인데 정작 그 사랑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누구와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사랑에 빠졌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하지 않죠. 대신 노래는 하나의 감각을 붙잡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진짜처럼 느껴지고, 가능하다면 이 감각이 영원히 계속됐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래서 ‘Everlong’의 가사는 특정한 연애 이야기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데이브가 실제로 경험했던 사랑에서 출발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사랑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누군가는 이 노래를 들으며 연인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이미 헤어진 사람을 떠올립니다. 또 누군가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을 떠올릴 수도 있겠죠. 그래서 어쩌면 ‘Everlong’이 오랫동안 사랑받은 이유는 사랑을 너무 정확하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Dave Grohl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적인 노래는 결국 푸 파이터스의 가장 대표적인 곡 중 하나가 되었는데요. 1997년 [The Colour and the Shape]에 수록된 ‘Everlong’은 이후 영국 오피셜 록 & 메탈 싱글 차트(Official Rock & Metal Chart) 2위에 올랐고, 미국에서도 얼터너티브 라디오를 중심으로 큰 반응을 얻었습니다. 현재까지도 스포티파이에서는 푸 파이터스의 최다 스트리밍 곡으로 자리하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데이브 본인은 이 곡이 밴드를 대표하는 노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하나의 곡이었을 뿐, 훗날 사람들이 푸 파이터스를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이 노래를 떠올리게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하죠.
[4] ‘Everlong’ 그 이후는..
그리고 ‘Everlong’은 발표 이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모습을 얻었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어쿠스틱 버전인데요.
데이브는 원래 이 곡을 어쿠스틱으로 연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어쿠스틱 버전을 연주하게 됐고, 그 경험을 통해 곡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팬들에게는 또 다른 형태로 인기를 끌게 되었죠.
그리고 이 곡에는 음악만큼이나 유명한 또 하나의 모습이 있는데요. 바로 뮤직비디오입니다.
프랑스 출신의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가 연출한 영상은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꿈속의 이야기처럼 전개되고, 영화 <The Evil Dead>를 연상시키는 장면부터 기묘한 의상과 거대한 전화기까지, 노래의 진지한 정서와는 어딘가 어긋나는 이미지들이 계속 등장하죠. 특히 데이브 그롤과 테일러 호킨스(Taylor Hawkins)가 각각 꿈을 꾸는 듯한 구조를 활용하면서, 한 사람의 사랑에서 출발한 ‘Everlong’을 초현실적인 코미디로 바꿔놓았습니다.
데이브는 훗날 공드리가 처음 제안했던 뮤직비디오의 아이디어가 너무 복잡해서 “노래가 4분밖에 안 된다”고 말해야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는데요. 공드리는 훨씬 더 거대한 이야기를 구상했고, 배우 대릴 해나(Daryl Hannah)가 데이브의 연인 역할을 맡는 아이디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Everlong’은 노래 하나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록 버전으로, 어쿠스틱 버전으로, 그리고 기묘한 뮤직비디오로 모습을 바꾸면서 계속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죠.
[5] 글을 마치며..

©Kenny Stoff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Everlong은 대체 누구의 사랑 노래일까요?
가장 간단한 대답은 루이스 포스트의 노래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데이브 그롤은 이 곡이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한 여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밝혔고, 루이스 포스트 역시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노래였음을 직접 이야기했죠. 그녀는 실제 녹음에도 참여했고, 후렴구의 화음까지 직접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1997년 이후 이 노래를 들은 사람들에게 ‘Everlong’은 더 이상 데이브와 루이스 두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는데요. 누군가는 이 노래를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배경음악으로 기억하고, 누군가는 이미 끝난 관계를 떠올립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결혼식에서 들었던 노래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 시절 우연히 들었던 록 음악일 수도 있죠.
If anything could ever be this good again
다시 또 이렇게 좋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데이브 그롤은 자신의 가장 사적인 순간을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빈자리에 각자의 기억을 채울 수 있었죠. 한때 데이브 그롤이 사랑에 빠진 한 사람을 위해 만들었던 노래는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각자가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했던 순간을 위한 노래가 되었습니다.
어쩌면 좋은 노래란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 듣는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것.

©Sam Jones / Trunk Archive
1996년 겨울, 데이브 그롤이 기타 하나를 들고 노래했던 사랑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그때의 관계도, 그 시절의 감정도 더 이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죠. 그런데도 ‘Everlong’을 들으면 이상하게 그 순간이 다시 돌아옵니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했던 날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느 계절로, 혹은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단 한순간으로. 사람은 떠나고, 사랑은 끝나고,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는데도 음악은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남겨두고 있습니다. 데이브 그롤은 자신의 사랑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이 노래를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영원해진 것은 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그때 느꼈던 감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Everlong’이라는 제목이 지금까지도 특별하게 들리는 이유일 겁니다. 영원할 수 없었던 한순간을 음악만큼은 영원히 남겨두었으니까요.
l Photo. Dave Groh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