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 글을 시작하며..
자, 오늘은 그린 데이(Green Day)의 마지막 스포트라이트 이야기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린 데이의 역사와 대표곡들을 함께 살펴봤는데요.
그린 데이의 팬분들, 히트곡 위주로 이 밴드를 알고 계신 분들, 혹은 그저 이름과 명성으로만 접해오신 분들까지.

©NIGEL CRANE / REDFERNS / GETTY IMAGES
사실 그린 데이라는 이름은 대중음악 시장 전반에 걸쳐 워낙 큰 영향을 미쳐왔기에, 대부분은 이 밴드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린 데이가 ‘어떤’ 밴드인가라는 질문에는 누구도 쉽게 하나의 답을 내놓기 어려우실텐데요.
누군가는 그린 데이를 펑크 밴드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팝 밴드, 혹은 팝 펑크 밴드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이 시대의 마지막 펑크 밴드”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죠.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의견이 모두 틀리지 않았으나, ‘펑크 밴드 / 팝 밴드 / 팝 펑크 밴드 / 이 시대의 마지막 펑크 밴드’라는 표현들이 모두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의견이 갈리게 된 배경에는, ‘펑크’라는 장르가 지닌 태생적인 특성과 그린 데이가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적·환경적 맥락이 깊게 자리하고 있는데요.

©KIM KULISH/CORBIS VIA GETTY IMAGES
그래서 결론적으로, “그린 데이는 어떤 밴드인가?”라는 질문에는 사실 정답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에디터를 포함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각자가 나름의 답을 내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잠시 과거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죠.
그래서 오늘은 아주 간략하게나마 펑크에 대해 그리고 그 안에서 그린 데이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었는지를 함께 짚어드릴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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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펑크, 그 시작은..
펑크 록은 1970년대, 뉴욕의 CBGB 클럽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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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요?
아마 많은 분들이 펑크라고 하면 섹스 피스톨즈(Sex Pistols)를 필두로 한 영국 런던의 이미지, 그리고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가 만들어낸 펑크 패션의 상징들을 먼저 떠올리실 겁니다.
실제로 런던 펑크는 폭발적인 영향력을 가졌었는데요. 그 이유는 단순히 음악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런던의 펑크는 하나의 ‘문화’이자 ‘운동’이었고, 당시 사회 상황과 깊게 맞물려 있었기 때문인데요.
당시 영국은 IMF를 겪을 만큼 경제 구조가 비효율적으로 고착화되어 있었고, 기성 세대가 장악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노동 조건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파업은 늘어났고, 일부 평론가들은 이 시기의 경제 침체를 아예 ‘영국병’이라고까지 부르기도 했죠.

©Shirley Baker
이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실업 수당에 의존해 삶을 이어가는 젊은이들이 늘어났고, 외국인 이주 노동자 유입으로 인한 인종 갈등까지 겹치며 당시의 런던은 말 그대로 금방이라도 붕괴될 것 같은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노동 계층의 분노, 상류 계층에 대한 적대감, 강한 계급 의식이 펑크 록이라는 음악을 만나며 폭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이지요.
하지만 다시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보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뉴욕의 펑크 씬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Ramones
패티 스미스(Patti Smith), 블론디(Blondie), 라몬즈(Ramones), 토킹 헤즈(Talking Heads), 지금에 와서는 모두 역사적인 이름들이지만, 당시의 뉴욕 펑크가 곧바로 대중적인 성공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언더그라운드에서는 브리티시 인베이전 이후, 글램 록까지 이어졌던 영국 중심의 록 음악 흐름에 맞서 뉴욕만의 정체성을 가진 음악이 언더그라운드에서 등장했다는 점에 열광했지만, 평론가들 같은 경우도 이것을 인정하고 펑크 록을 규정한 것은 이후의 일, 라몬즈 같은 밴드조차도 당시 차트에서는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을 정도였죠.
미국 역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세계 최대 경제 대국이라는 위치, 영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화되고 있었던 사회 갈등, 그리고 무엇보다 훨씬 보수적인 문화적 토양이 펑크가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큰 제약으로 작용했습니다.

©Paramount Pictures
그 결과, 미국의 대중 매체는 펑크 록을 지나치게 과격하고 예술적인 음악으로 인식했고, 젊은이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출구인 디스코를 찾게 되었죠.
(물론 디스코 역시 초창기에는 비주류로 분류되었지만, 록 음악이 지배하던 분위기에 대한 반발, 쾌락과 신체성에 대해 점점 관대해진 사회 분위기, 그리고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 사운드트랙의 대성공을 계기로 디스코는 단숨에 시대의 주류 음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문화와 결합해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던 런던의 펑크는 오래갔을까요?

©Richard Young / REX / Shutterstock
정답은 웃기게도 “아니요” 입니다.
주류 미디어와 대중 매체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순간, 런던의 펑크는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의 정체성과 충돌하게 되는데요.
펑크가 애초에 주류에 반발하기 위해 태어난 문화였는데, 그 반항이 유행이 되고 다시 시스템 안으로 편입되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 펑크는 더 이상 펑크일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펑크는, 망했습니다.

©SewGuide
하지만 그 짧은 전성기에 비해, 펑크가 남긴 유산은 실로 엄청납니다. DIY(Do It Yourself) 정신은 아티스트들에게 ‘인디’라는 새로운 활동 방식을 제시했고, 펑크는 이후 포스트 펑크, 하드코어 펑크, 팝 펑크 등 수많은 장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지점에서, 그린 데이의 출발점인 미국 캘리포니아로 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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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캘리포니아와 팝 펑크
미국의 록 밴드들은 펑크록이 등장하기 이전인 1960년대 후반부터, 이미 샌프란시스코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Winky West Side
그리고 펑크록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뒤, 캘리포니아에는 또 하나의 새로운 흐름이 생겨나는데요.
바로 하드코어 펑크(Hardcore Punk)와 이를 중심으로 한 언더그라운드 무브먼트였습니다.

©Larry Hulst—Michael Ochs Archives/Getty Images
기존 펑크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더 빠르고, 더 거칠고, 더 과격한 음악을 지향하는 동시에 언더그라운드 클럽과 공연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서로를 단순한 동료가 아닌 가족처럼 여기는 브라더/시스터후드 문화가 자리잡았죠.
이러한 문화가 형성된 배경에는 당시 캘리포니아의 사회적 상황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캘리포니아는 유색인종 이민자들에게 ‘기회의 땅’으로 인식되며 다양한 인구가 유입되었고, 그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밀려난 백인층의 소외감과 박탈감 또한 커져갔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낙오된 감정과 분노를 엮어낼 무언가가 필요했고, 하드코어 펑크는 단순한 음악 장르를 넘어 정체성과 공동체를 동시에 대변하는 커뮤니티로 기능하게 되죠. (그래서 앞서 하드코어 펑크를 음악인 동시에 무브먼트라고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정치적으로나 음악, 활동적으로 극단성을 띠던 하드코어 펑크 씬 안에서, 조금은 이질적인 방향성을 가진 밴드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디센던츠(Descendents)입니다. 이들은 사회 체제나 정치적 분노보다는, 이른바 ‘루저 감성’을 담은 자조적인 일상과 연애, 사소한 감정을 솔직하게 노래했고, 그 접근 방식은 기존 하드코어 펑크씬 안에서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는데요.
이에 더해 수어사이덜 텐덴시즈(Suicidal Tendencies)와 같은 밴드들은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급속도로 확산되던 스케이트보드 문화에 공개적으로 애정을 표하며 이를 밴드와 적극적으로 결합시켰고, 자연스럽게 펑크 록과 스케이트 문화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러한 밴드들의 등장은 하드코어 펑크의 에너지를 유지하면서도 조금 더 가볍고, 직관적이며, 대중에게 접근 가능한 펑크 록의 탄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흐름이 훗날 팝 펑크 대중화의 첫 단추가 되었죠.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1970년대 후반 이미 파워 팝의 영향을 받았던 라몬즈, 언더톤즈(The Undertones) 같은 밴드들이 멜로딕 펑크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앞서 이야기했듯, 당시의 펑크는 너무 빠르게 소모되고 사라졌기에 그 흐름이 온전히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밴드 외에도 배드 릴리전(Bad Religion)과 같은 밴드들의 음악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팝 펑크’와 음악적 특성이 닮아 있지만, 하드코어 펑크의 영향이 더욱 강한 ‘스케이트 펑크(Skate Punk)’라는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죠. (실제로 그린 데이의 초기 음악 역시 이 스케이트 펑크에 가까운 결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Rex Features
이후, 하드코어 펑크 씬처럼 폐쇄적으로 뭉쳐 있던 언더그라운드 문화와는 달리, 팝 펑크는 1980년대 후반부터 오프스프링(The Offspring), NOFX 같은 밴드들을 중심으로 인디 씬과 인디 레이블을 매개로 빠르게 확산되기 시작하는데요. 이들은 언더그라운드에 뿌리를 두면서도, 조금씩 더 넓은 청중과 소통하며 새로운 펑크 록의 궤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데요.
하드코어 펑크 씬과 이른바 ‘순수 펑크 주의자’들에게 팝 펑크는 아예 음악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앞서 이야기했던 런던 펑크의 몰락과 정확히 같은 논리이기도 하였는데요.

씬의 확장, 대중화, 그리고 메이저로의 진출은 펑크가 지향해온 정신과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것이었죠. 일부 평론가와 팬들은 팝 펑크가 음악적으로 지나치게 가볍고, 분노와 저항 대신 개인적 감정에 집중한다는 이유로 펑크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갈등이 이제 팝 펑크의 전성기를 연 그린 데이를 둘러싼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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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그린 데이가 등장하다!
대망의 1986년, 그린 데이가 결성됩니다.

©Green Day
밴드의 초기 사운드는 앞서 언급했듯 스케이트 펑크 성향을 띄며, 언더그라운드 씬에서 빠르게 호응을 얻었고, 그린 데이는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탄탄한 팬층을 쌓아 올리기 시작합니다.

©Green Day
특히나 1991년 발매된 정규 2집 [Kerplunk!]는 밴드의 위상을 단숨에 끌어올린 작품이었는데요. 독립 레이블에서 발매된 이 앨범은 미국 내에서만 5만 장 이상이 판매되며, 언더그라운드 펑크 밴드로서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 그리고 이는 곧 자연스럽게 메이저 레이블들의 관심으로 이어졌죠.
결국 그린 데이는 자신들이 속해 있던 독립 레이블 룩아웃! 레코드(Lookout! Records)를 떠나, 메이저 음반사인 리프라이즈 레코드(Reprise Records)와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리프라이즈와 계약한 지 불과 3주 만에 녹음을 마친 그들의 메이저 데뷔 앨범이자 정규 3집 [Dookie]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는데요.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200(Billboard 200) 2위에 오르며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장이 판매되었고, 이듬해인 1995년에는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얼터너티브 뮤직 퍼포펀스(Grammy Award Best Alternative Music Performance)상을 수상하는 쾌거까지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성공은 단순히 한 밴드의 대중적 돌파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Dookie]는 팝 펑크를 단숨에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리며, 1990년대 팝 펑크 붐의 서막을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데요.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그린 데이는 펑크 씬 내부에서 가장 논쟁적인 이름으로 떠오르게 되죠.

©Visit Berkeley
당시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린 데이는 90년대 미국 펑크 씬의 성지로 여겨지던 924 길먼 스트리트(924 Gilman Street)에서도 영구 출입 금지 처분을 받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반체제적 구호나 정치적 급진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아닌 무료한 일상과 청춘의 불안, 좌절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담아낸 그린 데이의 음악이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자, 하드코어 펑크 씬과 ‘순수 펑크’를 자처하던 이들에게 이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죠.
그렇게 그린 데이는 단숨에 ‘펑크를 배신한 밴드’, 혹은 ‘펑크를 대중에게 팔아넘긴 상징’이 되었고, “그린 데이는 과연 펑크인가?”라는 질문이 현재까지도 반복해서 소환되는 논쟁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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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그래서 얘네 펑크야?
"당신들이 우리로부터 펑크 록이라는 환경을 빼앗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절대로 우리 안의 '펑크 록' 자체를 부정하진 못할 거야"
- 그린 데이, 빌리 조 암스트롱(Billie Joe Armstrong)

©Green Day
어떠한 형태로든 펑크가 일반 대중에게까지 이 정도의 영향력을 미친 사례는 드뭅니다.
팝 펑크를 주류의 중심으로 끌어올린 그린 데이의 행보 역시 마찬가지죠.
[Dookie] 이후, 그린 데이 앞에는 그 어떤 선례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팝 펑크를 메이저 시장에서 성공시킨 이후에 “밴드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어디에도 없었고, 밴드는 오롯이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야 했습니다.
그 과정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는데요. 그린 데이는 펑크 씬의 비판을 그저 무시할 수도 없었고, 동시에 성공에 대한 죄책감 역시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린 데이는 스스로를 부정하고, 해체하고, 다시 쌓아 올리는 선택을 반복하게 되는데요.
성공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팝 펑크 사운드를 의도적으로 덜어낸 정규 4집 [Insomniac], 포크와 서프 록 등 장르적 실험을 이어간 정규 5집 [Nimrod], 그리고 저항적인 메시지의 등장과 함께 어쿠스틱 사운드를 결합시킨 정규 6집 [Warning]까지.
이 시기의 그린 데이는 분명 상업적 하락세를 경험했지만, 그럼에도 자신들이 뻗어나가는 새로운 발자취에 대한 실험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행착오 끝에, 그린 데이는 스스로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만들어냅니다.
록 오페라 형식의 컨셉 앨범이라는 과감한 선택, 정규 7집 [American Idiot]과 정규 8집 [21st Century Breakdown]의 탄생이었죠. 이 앨범들은 단순한 성공이 아니라, 그린 데이가 대중적 성공 이후에도 여전히 저항적일 수 있음을 입증한 결과물이었습니다.

©MIKE COPPOLA / GETTY
그렇게 2015년, 그린 데이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데요. 자격 요건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이 자리에, 당시 40대 초반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이름을 올린 것은 밴드가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로큰롤의 발전과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는 평단의 공통된 평가와 지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그린 데이가 펑크라는 언어를 얼마나 넓은 대중에게 확장시켰는지를 가늠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죠.
결국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옵니다.

©Insia Haque / 34th Street Magazine
“그래서, 그린 데이는 펑크 밴드야?”
만약 펑크를 언더그라운드에 머무르며 절대적으로 주류와 결별해야만 하는 형식 혹은 특정한 사운드와 장르적 규칙으로만 정의한다면, 그린 데이는 분명 그 기준에서 벗어납니다.
하지만 펑크를 DIY에서 시작되는 자유와 개성을 스스로의 언어로 끝까지 표현하려는 집요한 의지와 태도로 본다면, 그린 데이는 21세기에 펑크가 정신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계승될 수 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밴드에 가깝습니다.

©MURRAY BOWLES
그린 데이는 캘리포니아 펑크씬을 중심으로 한 DIY 문화 속에서 스스로 무대와 기회를 만들어왔고,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한 이후에도 시장이 요구하는 이미지를 따르기보다는 스스로의 감정과 문제의식을 음악으로 밀어붙였죠.
그리고 상업적으로 안전한 공식을 반복하는 대신, 사운드와 메시지를 끊임없이 바꾸며 자신들의 언어를 갱신하고,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들을 수식하고 있는 ‘펑크’란 단어는 어떠한 형식이나 위치가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내겠다는 록이 지닌 정신과 태도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그린 데이는 그 태도를 대중적인 규모로 확장시킨 드문 사례라는 점에서 서두에서 언급한 ‘이 시대의 마지막 펑크 밴드’라는 수식으로 불리고 있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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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글을 마치며..
"내가 쓰레기통을 차면 펑크지만 네가 쓰레기통을 차면 그건 따라하는거다”
- 그린 데이, 빌리 조 암스트롱(Billie Joe Armstrong)
에디터에게 그린 데이는 분명한 펑크 밴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 펑크 주의자들을 배척하고 싶은 마음은 아닙니다. 문화와 정신은 언제나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른 형태로 계승되어 왔고,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이어질지는 누구도 단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선택의 방향에는, 각자 나름의 이유와 맥락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유얼라이브에서 일전에 소개드렸던 리퓨즈드(Refused)처럼 하드코어 펑크 씬 내부에서조차 다시 한 번 장르적 문법과 행동 양식을 뒤엎으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 밴드가 있는가 하면, 거스 발드윈(Gus Baldwin)처럼 오늘날의 시점에서 ‘펑크’라는 개념을 또 다른 방향으로 재해석하려는 신인 아티스트들을 제가 좋아하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The Exploited
펑크라는 장르 자체가 단순한 음악 장르로 시작된 것이 아니기에, 지금까지도 이렇게 다양한 문화, 태도, 표현 방식과 엮이며 살아남을 수 있던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음악의 다양성과 그 맥락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에디터 개인적으로는 재밌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그린 데이는 어떤 밴드인가요? 그리고 여러분이 생각하는 ‘펑크’란 무엇인가요?
l Photo. AP Magazine